“사람이 전부예요. 사람만이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죠. 경쟁보다 공생이 필요한 시대잖아요.”
일러스트레이터 플로랑 마넬리Florent Manelli의 인스타그램과 웹사이트(florentmanelli.com)에는 매일 새로운 얼굴이 등장한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웃는지 우는지 표정을 알 수 없는 얼굴은 한결같이 보는 이의 눈을 또렷이 마주 보고 있다. 연필 선과 파스텔컬러가 녹아든 얼굴은 쉽게 눈을 떼기 힘들다. 지난해 플로랑 마넬리는 얼굴 그림 작품을 모은 책 <40 LGBT + qui ont changé le monde>를 출판했다. 그는 작품으로 성소수자(LGBT)의 활동을 지지하고 사람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전한다.
오늘은 어떤 얼굴을 그렸나요?
어제 저녁에 스케치한 3명의 인물에 색칠을 했어요. 새로 구입한 과슈(무광 불투명 수채 물감)를 시험하려고 물과 섞어서 칠해봤죠. 전에는 배경이 심플한 초상화를 그렸는데 요즘에는 여러 가지 모티프를 넣어서 그림을 그려요. (책상에 놓인 구사마 야요이 포스터 아래쪽를 가리키며) 이 그림처럼 인물 주변에 복숭아를 그려 넣는 식이죠.
베라 록라인이 겨우 37세의 나이로 1934년 4월에 죽었을 때, 그녀는 명성의 정점에 있었다. 러시아 태생의 이 이민자는 1921년 파리로 이주한 후 꽤 유명해졌다. 오비투아리는 ‘비할 수 없는 손실’과 ‘확실한 재능’에 대해 말했다. 미술 평론가 마리우스 아리 르블론은 그녀를 ‘수 년 동안 파리 미술이 겪은 가장 고통스러운 [모멘텀] 중 하나’라고 한탄할 정도로 그녀를 ‘위대한 베네치아인들과 르누아르의 자매’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화가는 죽은 후 수십 년 동안 거의 잊혀졌다. 2002년 몽파르나스 미술관에서 열린 단체 전시회인 엘레스 드 몽파르나스(Elles de Montparnasse)에서 소니아 들로나이, 타마라 데 렘피카, 나탈리아 곤차로바와 같은 여성 동료들과 함께 그녀의 작품이 전시된 후에야 그녀의 그림이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이 화가의 성공은 주로 그녀의 여성 나체 그림이었다. 그러나 위의 그림 ‘카드 플레이어스’는 그녀가 아마도 가장 전위적인 위치에 있었을 때인 그녀의 경력 중 더 이른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는 1919년, 현재 크리스티의 온라인 러시아 아트 세일에서 제공되고 있는 그림인 Vue de Tiflis와 같은 해에 위 그림을 그렸다.